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남대총 북분 금관 (문단 편집) == 내용 == 높이 27.5cm, 드리개(수하식) 길이 13-30.3cm. [[황남대총]]에서 발견된 [[신라]]시대 [[금관]]으로, 제작연대는 대략 4세기 후반~5세기 초반이라고 추정한다. 같은 시기에 제작되어 황남대총에 함께 묻힌 [[황남대총 북분 금제 허리띠]], [[황남대총 남분 금목걸이]], [[황남대총 북분 금팔찌 및 금반지]], [[황남대총 북분 유리잔]], [[황남대총 북분 은제 관식]], [[황남대총 북분 금제 고배]], [[황남대총 북분 은잔]], [[황남대총 북분 금은제 그릇 일괄]], [[황남대총 남분 금제 허리띠]], [[황남대총 남분 금제 관식]], [[황남대총 남분 은관]], [[황남대총 남분 은제 팔뚝가리개]] 등 7만여 점에 이르는 유물들과 함께 발견되었다. 황남대총은 발굴 당시 남쪽에 있는 남분(南墳)이 [[왕]]의 능이고, 북쪽의 북분(北墳)은 그의 부인인 [[왕비]]의 능이었음이 밝혀졌는데, 특히 북분의 발굴 당시 발견된 은제 허리띠 꾸미개에 '부인대(夫人帶)'라는 구절이 있으므로 여자가 쓰던 관임이 거의 확실하다. 그런데 정작 북분에서 발견된 이 여성용 금관은 크고 화려한 금관인 반면, 남분에 안장된 남성용 금관은 상대적으로 덜 화려한 금동관이어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. 여러 설[* 대표적인 설로는 남분에 묻힌 왕은 본래 [[부마]]였다가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북분에 묻힌 왕비가 훨씬 왕족으로서 권위가 높았기 때문에 북분에 금관이 묻혀졌다는 것이다. 다만 실질적인 증거가 아닌 추정이기 때문에 정설은 아니다.]이 나오고 있지만 현재까지도 여전히 여성이 남성보다 더 귀한 관을 쓰고 있는 정확한 이유는 [[미스터리]]로 남아있다. 무덤 축조 시기의 경우 최초 한일학계에서는 황남대총과 같은 거대한 신라 능묘는 [[고구려]]의 영향에서 벗어난 신라가 독자적인 발전을 이룬 시기에 만들었을 것으로 파악하여 [[눌지 마립간]](417년~458년 재위)의 왕릉이라는 설이 다수였으나, 이후 지속적인 신라시대 유물 발굴 및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기존 신라의 내적 수준을 지나치게 낮추어 보는 시각을 비판하는 여론이 한중일 동아시아 삼개국 역사학계에 두각을 나타냈다. 현재 이 왕릉의 축조시기도 [[내물 마립간]](356년~402년 재위) 혹은 [[실성 마립간]](402년~417년 재위) 시기로 보는 시각이 대세이다. 즉 이 금관의 주인도 남분에 묻힌 왕이 누구냐에 따라 그 시기의 왕비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.[* 눌지 마립간이라면 왕후 [[차로부인]], 실성 마립간이라면 왕후 [[아류부인]], 내물 마립간이라면 왕후 [[보반부인]]이 이 금관의 주인이었을 것이다.] 그러나 북분의 주인이 [[자비 마립간]]이라는 [[https://www.hani.co.kr/arti/culture/culture_general/690832.html|주장도 있으니]] 이 설을 따르면 자비왕이 이 금관의 주인이었을 것이다. 이에 따라 이 금관 및 왕릉에서 함께 발견된 유물 7만여 점은 356년~417년 사이에 [[한반도]]에서 제작되었다고 거의 확실시된다. [[국립경주박물관]]에서 재질을 조사한 결과 순도 86.2%의 [[순금]]으로 확인되었다. [[KBS 1TV]]의 교양 프로그램 [[천상의 컬렉션]] 6회에서 대표 문화재로 소개되기도 하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